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순왕후(조선 영조) (문단 편집) === 정조 궁정의 궐내 견제자 === 정순왕후 김씨가 [[사도세자]] 추숭에 부정적이었던 [[벽파]]의 중심점이었던 것은 사실이다. 그러나 이를 '야당' 노릇이라고 보는 것은 애매한 측면이 있다. '''[[정조(조선)|정조]] 시대 [[벽파]]는 오히려 [[정조(조선)|정조]]의 즉위 과정이나 [[정조(조선)|정조]]의 치세 내내 여당에 가까웠으나, [[정조(조선)|정조]]의 탕평 행보에만 거리를 둔 것이었기 때문이다.''' 또한 주의할 점은 [[벽파]]가 [[사도세자]]를 싫어한 것까진 아니었다는 점이다. '''[[사도세자]]의 [[임오화변|폐세자]]가 잘못이니 도로 [[추존|추숭]]하는 것이 맞다는 결론이 나오는 순간, 당시 조정을 주도했던 [[노론]]계는 잘못하면 [[정조(조선)|왕]]의 [[사도세자|생부]]를 모함한 [[역적]]으로 전락하기에 결사반대할 수밖에 없었다.'''[* 물론 이 당시 조정내 집권 노론은 영조 치세 동안 주류였던 탕평당 계열이 아니라 청명당 계열이지만 어쨌든 둘 다 노론이었고 청명당도 주류가 아니었을 뿐 조정에 포진해 있었다.] 애초에 [[정조(조선)|왕]]의 [[사도세자|생부]]를 모함한 세력이 없었으며,[*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시도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. 영조가 직접 자기 자손들을 다 박살내고 생판 남에게 왕위를 물려주려고 하지 않는 이상 결국 왕위는 영조의 자손에게 넘어갈 수밖에 없는데, 문제는 '''당시 살아있는 영조의 자손들이 전부 사도세자 아니면 그 자식들이었다.''' 즉 사도세자를 모함했다간 나중에 사도세자 아니면 정조, 은언군, 은신군, 은전군 중 하나에게 반드시 박살나는 셈이었다. 실제로 임오화변 당시 조정의 주류 세력이었던 노론 중에서도 탕평당은 사도세자와 관련하여 정조에게 안 좋은 시선을 받았고 결국 몰락했다.] '''[[사도세자]]의 죽음은 [[영조]]가 주도했다'''. [[벽파]]가 [[사도세자]] [[추존|추숭]]에 부정적이었던 건 큰 죄를 지어 [[영조]]가 [[임오화변|직접 처분]]한 [[사도세자]]를 [[추존|추숭]]하지 말라는 유명을 조부인 [[영조]]로부터 직접 받은 손자 [[정조(조선)|정조]]가 이를 뒤집는 것이 옳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으며, 더 나아가 [[추존|추숭]]을 통한 정권 교체를 기도하고 있었던 [[남인]]의 영수 [[채제공]]에 대한 경계 때문이었다. 정순왕후의 두드러지는 행보는 바로 [[정조(조선)|정조]]의 동생인 [[은언군]] 이인에 대한 처벌 문제에서 나타난다. [[정조(조선)|정조]]가 [[은언군|은언군 이인]]에 대한 처벌을 완화하려는 시점마다, 정순왕후는 단식 투쟁을 벌이며 이인을 처벌하라고 다그쳤다. [[정조(조선)|정조]] 역시 [[단식]]으로 맞섰으나 결국 매번 손을 들게 되었다. 하필 [[은언군]]인 이유는 바로 그가 숙적인 북당의 [[홍봉한]]과 적극 연계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. 즉, [[은언군]]이 [[역적]]이라면 [[풍산 홍씨]]도 [[역적]]과 연대한 존재가 되었으며, 거꾸로 [[은언군]]을 사면한다면 [[풍산 홍씨]]도 역시 사면되는 상황이었다. 하지만 [[풍산 홍씨]]가 [[은언군]]을 옹립하려는 시도는 분명 사실이었기에,[* 은언군도 은언군이지만 아들인 상계군 이담 역시도 역모에 몇번 얽혀진 바 있었다.] [[남인]]들조차도 [[정순왕후|대비전]]의 요청을 거절해야 한다고 외치지 못하고, 대비전의 뜻을 따르라며 외쳐야 하는 상황이었다. 분명한 [[명분]]을 앞세워 [[정조(조선)|정조]]의 사면, 완화 행보를 압박하는 것이 바로 정순왕후의 역할이었다. 하지만 [[정조(조선)|정조]]도 보통 머리는 아니어서 수시로 [[은언군]]을 불러다 만났는데, 이 과정에서 [[심환지]]가 >"어찌 병가에서 계책을 내어 적을 속이듯 하십니까?" 라고 놀랄 정도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. 그리고 이런 [[정조(조선)|정조]]의 행동으로 인해 민심도 [[정조(조선)|정조]]에게 우호적으로 바뀌었다. [[정조(조선)|정조]]에게 [[은언군]]은 유일한 혈육이자 이복 형제였으며,[* 은전군은 재위초에 역모에 얽혀 사사당했고 은신군은 유배지에서 죽었다.] 그 말은 [[정조(조선)|정조]]의 아버지인 [[사도세자]]의 (정조를 제외한) 유일한 아들이란 뜻이었다. 따라서 민심은 '[[정조(조선)|주상]]께서 [[은언군]]과 저렇게 우애가 좋으니, 이건 [[사도세자|아버지]]에 대한 효도이기도 하다'란 형태로 바뀌게 된 것. 그리고 민심이 이렇게 바뀌자 정순왕후의 압박도 상대적으로 약해지게 된다. [[유교]] 국가인 [[조선]]에서 '''효'''(孝)라는 명분은 너무나 굉장히 강한 명분이었고, 그 명분을 중요시하는 정순왕후로선 더 이상 압박을 강화하기가 곤란해졌기 때문이다. 하지만 동시에 정순왕후는 [[정조(조선)|정조]]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한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. [[정조(조선)|정조]]가 [[사망|승하]]하기 직전 직접 [[약]]을 들고 방에 들어갔다가 갑자기 대성통곡을 하여 신하들이 말렸는데, 이미 [[정조(조선)|정조]]의 병환이 회복 불가능한 상황임을 정순왕후 또한 짐작한 듯 하다. [[정조(조선)|정조]] 어록집인 《[[일득록]]》에는 정순왕후를 향해 친밀한 감정을 나타내는 기록이 전하고, 정순왕후는 [[정조(조선)|정조]]의 《행록》을 쓰며 [[정조(조선)|정조]]가 자신을 극진히 공양했음을 나타내고 있다. 그 외에도 [[홍인한]], [[정후겸]]을 척결하는 명분을 나타낸 책인 《명의록》에서 [[정조(조선)|정조]]가 남당의 [[김귀주]]를 비호했다던지, 내전의 도움이 많았음을 기록한 것으로 보아 둘의 사이는 오히려 좋았을 가능성이 높다. [[정조(조선)|정조]]가 의식을 잃기 직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도 정순왕후의 거처인 '[[창덕궁 수정전|수정전]](修政殿)'을 언급한 것인데 정황상 자신의 [[죽음]]을 앞두고 급히 정순왕후를 찾으려 했다는 추정이 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